
[뉴스클레임]
“그 분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이 그 분들의 이익이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전화가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의 진상규명 조사단 발표를 두고 낸 입장문 제목이다. 단 한 문장이지만, 이 사회의 권력형 성폭력이 왜 계속 반복되는지를 명확히 드러낸다.
안희정, 오거돈 사건을 거쳤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다. 권력을 가진 남성이 ‘그분’이 되고, 그 주변에선 그의 기분을 맞추는 것이 생존의 방식이 된다. 권력자는 변하지 않고, 조직은 침묵하며, 피해자는 다시 고립된다.
요즘 SNS에서는 김민웅 교수의 글을 공유하며 박원순의 명예회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묻기 전에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박원순은 왜 변호사 시절, 서울대 신교수 성희롱 사건을 법정으로 끌고 갔는가. 왜 그 사건이 대한민국 최초의 직장 내 성희롱 승소 판결로 기록되었는지 기억해야 한다. 그때 그는 ‘별거 아닌 일’의 본질이 얼마나 깊은 사회 구조의 문제인지를 보여준 사람이었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 그가 권력을 쥔 자리에서 벌어진 또 다른 ‘별거 아닌 일’에 대해, 왜 우리는 그때와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가.
박원순 사건은 단순한 성희롱이 아니다. 이는 여성 노동자의 노동조건 문제다.
비서라는 직책 아래 젊은 여성 노동자는 시장의 기분을 살펴야 했고, 그게 곧 조직의 원활한 업무를 위한 ‘필요한 역할’로 정당화되었다. 피해자는 4년 동안 스무 차례나 서울시에 도움을 요청했다. 돌아온 답은 “예뻐서 그랬겠지”였다. 매뉴얼과 제도를 자랑하던 서울시조차 일상화된 성희롱을 조직문화의 일부로 방치했다.
서울시장의 기분을 살피는 것이 곧 조직의 안녕으로 연결된다는 이 기형적 관행 속에서, 피해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어갔다. 인권변호사 출신의 시장을 ‘우리 사회의 자산’이라며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는 인간이었고, 피해자 또한 인간이었다. 그저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친 여성 노동자의 절규를 우리는 어떻게 외면할 수 있는가.
지금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박원순의 명예’가 아니라 ‘피해자의 노동권’이다.
성희롱은 개인 간의 일탈이 아니라, 조직의 권력구조 속에서 반복되는 폭력이다. 가해자가 가진 사회적 영향력, 피해자가 속한 노동적 위치, 이 둘의 격차가 낳는 불평등이 바로 범행의 뿌리다.
진보라는 이들이여, 왜 여전히 ‘그분’의 명예를 지키는 데만 목소리를 높이는가. 진정한 진보라면 피해자가 동료이자 노동자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일터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인간에게조차 등급을 매기며, 누가 더 중요한가를 따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분’의 기분을 위해 존재하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이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망각한 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