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법, 비정규직 근로자지위확인 소송 원고 승소
대책위 “정부·공공기관 책임 회피 말아야”

[뉴스클레임]
서울중앙지방법원이 28일 한전KPS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에서 불법파견을 인정했다. 법원은 발전소 경상정비 업무를 하청 노동자에게 맡기는 형식이 도급계약일 뿐, 실질적으로는 원청이 직접 지휘·감독한 불법파견이라고 봤다.
이날 ‘태안화력 고 김충현 비정규직 노동자 사망사고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는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충현의 죽음 이후 90일 가까이 거리에서 싸워온 지난한 투쟁 끝에 얻어낸 사회적 응답”이라며 “한전KPS가 더 이상 항소로 시간을 끌지 말고 즉각 직접고용과 정규직화를 이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승소는 4년에 가까운 사회적·법적 싸움의 결과다. 2021년 국정감사에서 정의당 배진교 의원이 KPS 하청노동자의 노무비 착취 구조를 폭로하면서 사건의 본격적인 문제 제기가 시작됐다. 당시 1억4900만원의 노무비가 세 차례 하청을 거치며 4900만원으로 줄어드는 사실이 드러나 사회적 충격이 컸다.
이후 2022년 6월 태안발전본부 하청노동자 24명이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같은 달 국회 소통관에서 노조와 대책위는 기자회견을 열어 불법파견 중단과 직접고용을 촉구했다. 2022년부터 2024년까지 이어진 법원 심리에서는 원청의 직접 지시, 혼재작업, 다단계 하도급 구조 등 불법파견 정황이 집중적으로 검증됐다.
올해 6월에는 판결을 앞두고 대책위와 비정규직지회가 다시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와 공기업이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던졌다. 이후, 마침내 이날 법원이 불법파견을 공식 인정하면서 노동자들이 원고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법원이 주목한 것은 하청 노동자들이 겪어온 구조적 모순이었다. 우선 노무비 단가가 왜곡돼 있었다. 2019년부터 2021년까지 KPS는 사업 설계 과정에서 보통인부 비율을 비정상적으로 높게 책정했다. 시중 노임 단가가 매년 오름에도 불구하고 실제 임금은 도리어 줄어드는 결과가 발생했다.
경상정비 하도급 범위 또한 불명확했다. 태안·제주 사업소 등의 현장 계약서는 업무 범위를 명료하게 규정하지 않아, 발주처 필요에 따라 사실상 무제한적으로 하청노동자들이 투입됐다. 이는 노동자들에게 예측 불가능한 노동 강도와 안전 위험을 안겼다.
‘물량도급’이라 명시된 계약이 실제로는 ‘노무도급’ 형태로 운영된 것도 문제로 드러났다. 특히 협력업체와 동의 없이 계약 조항이 바뀌며 주말·휴일 근무에 대한 임금 체불이 반복됐다. 일부 체불은 고용노동부 신고 이후 뒤늦게 정산됐으나 구조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여기에 기간제법 회피를 위한 ‘쪼개기 계약’도 짚였다. 2년 이상 근속 시 정규직 전환이 의무화되지만, KPS는 근로계약을 단기간으로 반복 갱신하는 방식으로 책임을 피했다. 나아가 다단계 재하도급 구조 속에서 노무비가 상층에 흡수되며 노동자의 몫이 줄고, 상시적인 임금 삭감과 무급 노동이 강요되는 현실도 이번 재판에서 드러났다.
대책위는 “발전소 현장은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규정하며 공공부문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들은 “원청은 이익만 취하고 책임은 피하며 하청노동자가 죽음으로 내몰리는 구조를 이번 판결이 드러냈다”며 “정부는 핑계 삼지 말고 공공부문부터 불법파견과 외주화를 철폐하겠다는 확고한 방침을 세워야 한다”고 요구했다.
공공운수노조 한전KPS 비정규직지회도 “이번 판결은 비정규직 이름으로 차별받아온 수많은 노동자들의 현실을 법이 인정한 것”이라며 “이제 즉각적인 정규직 전환과 임금 피해에 대한 정당한 배상이 뒤따라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오는 9월 현장으로 복귀해 투쟁을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대책위 등은 “정의로운 전환이란 더 이상 사람이 일터에서 죽지 않게 하는 것”이라며 “우리는 죽음의 외주화를 끝내기 위해 끝까지 싸워나가겠다”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