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김파란 편집위원
사진=김파란 편집위원

[뉴스클레임]

자마찐의 소설 '우리들'을 읽으면서 내가 받았던 충격과 감흥을 너무 가볍게 논하는 소위 러시아 문학 전공자의 영상을 접한 적이 있다.

물론 19세기 러시아 문학이 단순하게 영국문학, 프랑스 문학, 이탈리아 문학, 독일문학, 러시아 문학이라는 분류에 속하지 않는 한 단계 높은 수준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해서 러시아 문학이라고 할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가들이 톨스톨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다.

하지만 1917년 혁명이 일어났던 시기를 전후한 20세기 소비에트 문학이 이런 러시아 문학에서 단절된 쓰레기 문학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19세기 러시아 문학과 다른 새로운 언어들과 혁명으로 이어졌다. 또 여기서 '닥터 지바고'가 나온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를 말하면서 20세기 소비에트 문학을 얘기함과 동시에 소비에트 문학 내의 소비에드 문학 답지 않은 원러시아 문학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하나의 예시가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다. 이 말은 사회주의 시대라 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거 하나만이 공식적인 유일한 이제올로기로서 도그마처럼 뒤덮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예술이라는 것은 뭔가 단 하나 그것으로 모든 시대를 대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또한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로 이어지는 러시아 19세기 사실주의 문학을 좋아한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19세기 전반기는 개인의 상상력과 감성을 중시하는 낭만주의 시대라 할 수 있고, 후반기는 사회 현실의 반영에 중점을 두는 사실주의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를 구분하는 것은 사실 무의미한 것이다. 러시아에서 작가들은 유달리 조국에 대한 문학의 책임을 강조하며 사명의식이 투철하다. 일례로 내가 몇 번 페북에 올렸지만 고골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이런 러시아 작가들의 '사명의식'이었다.

또한 민중을 사회제도의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열망과 자유에 대한 희구로 고양된 문학에 압도되지 않는다면 글을 쓰는 사람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19세기 러시아 작가들의 정신은 인류 예술적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그 이후 러시아 문학이 19세기 러시아 문학에 비해 소위 전문가들이 말하는 '끕'이 떨어진다는 생각은 한번도 하지 못했다. 아니 그들은 이런 문학적 전통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계승했다. 비록 자신이 열렬하게 지지한 체제라도 인민과 민중의 고통을 담보로 할 때에는 가차없이 반기를 들고 문학적 봉기를 했다. 

그런데 어떤 문학 교수가  예브게니 자마찐의 소설 '우리들'을 비평을 하기 위해 다시 읽었는데 너무 길고 재미가 없었다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은 19세기 러시아 문학이 전공이라 그렇다고 말했다.

즉 19세기 문학과 20세기 러시아 문학은 "끕'이 다르다는 말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벌써 자마찐이 답을 했었다.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 작가가 진실로 혁명적인 표현의 실험을 거부하고 구태의연한 19세기적 리얼리즘을 고집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며, 과학과 혁명이 구세계를 파괴해 버린 상황에서 그러한 리얼리즘은 시대의 요구에 맞지 않고 낡고 반동적인 창작 방법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러시아 문학이 아니라, 그럼 이 교수는 왜 관심도 없는 자마찐의 소설을 소개하고 아는 척을 하는 것일까? 아니 왜 우린 이런 전문가들에게 예술적 감흥도 물어보는 무지를 보이고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이 교수는 유튜브에서 온갖 문학 작품에 대해 비평을 한다. '정말 저걸 다 읽었을까'  또 '읽었다면 왜 읽었을까' '유튜브에 올리기 위해...' 자신은 안목으로는 재미도 없고 지겹기만 한 작품도 꼭 그렇게 비평을 해야 하는지 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 어떤 글이 좋은 것이냐,  어떤 그림을 수준이 높은 것이냐,  왜 악기를 켜냐고, 왜 노래를 부르냐고, 묻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까. 있어 본들 '뇌가 씻겼을' 뿐이겠지. 그냥 좋으면 좋은거고, 싫으면 싫은거지. 

그러나 이 시대는 이런 것조차 전문가의 표식을 원한다. 

- 그 소설을 어떻게 읽으셨나요?
- 이 작가는 괜찮은 작가인가요?

인간 본성에 대한 감정 마저도  오직 전문가, 만이  세상에 공급할 권리가 있는 듯이 지식인의 말을 신뢰한다. 

사실 문학 작품의 등급을 말하는 것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님을 알고 있다. 이것을 '문학성' 이라는 말로 순화시키는 것도. 또 쟈마찐의 작품에 대한 이런 류의 비판이 그 당시에도 맹렬했다. 이런 비판에 대해 자마찐은 프롤레타리아 작가들이 주장하는 리얼리즘은 1860년대의 소박한 리얼리즘이라고 단언하고, 혁명적인 표현의 실험을 거부하고 구태의연한 19세기적 리얼리즘을 고집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반박하며 좌파 비평가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문학사의 역사만큼 '문학이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의 역사도 함께 해왔다. 문학은 쟈마찐의 저 말처럼 문학은 '새로운 말'이다. 새로운 말인 문학을 존재해오는 어떠한 말로 규정하고 등급을 나누는 것은 어쩜 문학 전문가들이 그처럼 숭배하는 '문학'자체를 배반하는 행위가 아닐까? 여지껏 세상에 없던 말로 즉 허구로 현실의 부조리를 더욱 현실감 있게 만들어 내는 사람들과 그 작품들을 여지껏 있는 말로 비교해서 작품 수준을 논하는 자체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문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문학은 비평가들의 언어로 포착화하여 개념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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