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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스물아홉에 들어간 공장에서 한 일은 자동알곤용접기계를 보는 일이었다. 이것이 기계화 되기 전에는 남성 노동자가 했고 반자동화가 되었을 때 중소기업에서 병역 특례를 받던 숙력공이 아닌 일반 노동자가 했다. 이것을 자동화 시켜 여성 노동자인 내가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회사는 일일 생산은 배가 넘게 올렸고, 나가는 임금은 반으로 줄였다. 이것을 관리자들은 자동기계 도입으로 인한 원가절감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누가 내 자리에서 그런 착취를 당하고 있을까! 베트남, 캄보디아, 중국에서 온 여성들이다.

상상할 수 없겠지만 자동알곤 용접기에 두 대 앞에서 11시간 서서 용접 통안으로 계속 제품을 투입해야 했지만 앉을 의자 하나 없었다. 아니 의자가 있다 한들 앉을 시간도 없이 제품을 계속 투입해야 했으니 항상 손목에는 파스를 붙어 있었다. 그때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노동 시간은 그 이후의 내 삶에 너무큰 장애로 남았다. 지속적인 통증과 뼈의 변형은 평생 달고 살아야 할 고통이 되었다

관리자들이 원가절감이라고 말하는 자동화가 여성인 내가 편하게 일 하라고 자동화 시킨 것이 아니었기에, 더 많은 작업 물량을 위해, 더 강도 높은 단순 반복 노동을 해야만 했다.

2000년 용접기계 두 대 앞에서 8시간에서 11시간 서서 일하고 받은 임금이 44만원에서 60만원이었다. 잔업을 하지 않으면 생활이 되지 않았다. 회사는 나를 고용하면서 두 배의 이익을 가져갔지만, 나와 같은 남성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고 그 자리에 들어간 나는 아무리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외친 사회에서 나는 몸이 아파도, 아이가 아파도 일을 해야 했다. 법 앞에서 평등하더라도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평등이라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

지금 내가 일했던 그 현장에는 누가 있을까! 피부색이 다르고 말이 다른 타국의 여성들이 있을 것이다. 모든 계급의 여성이 억압을 경험하지만 계급에 따라 여성의 처지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사회는 이렇게 살아가는 하층의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들은 불안정한 노동, 형편없는 저임금을 마땅히 감수해야 할 것으로 여긴다. 그렇게 살기 싫으면 , 돈 있는 부모 만나거나, 이 사회의 모든 경쟁에서 이겨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된다는 인식이 지배한다. 즉 나쁜 노동조건 심지어 생명이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노동조건이 공정한 '경쟁'에서 패배한 자들이 마땅히 감수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정규직 신규채용이 줄어들고 불안정한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은 사회의 필연이 아니라 기업과 국가의 정책적인 선택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이 감춰진다.

더 비극적인 것은 이번 새벽배송 금지를 두고 벌어지는 상황이다. 당사자인 택배 노동자들이 반대를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 사업자들이(기업)이 '내 사업을 방해하니까 안 돼'라고 했다면 기업이 매출을 위해 노동자들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 무리한 노동을 시킨다 비판할 수 있겠지만 노동자들이 '내가 한다는데 무슨 상관있냐', '그걸로 먹고 사는데'라고 외치며 반대하는 목소리에 선뜻 비판의 목소리도 내지 못한다. 

기업은 그냥 뒤에서 선량한 얼굴로 가만히 있을 뿐이다.

여기서 누구나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노동자는 하루 정상적인 노동시간을 일해서 생활할 수 있는 임금을 받아야 한다.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일할 권리가 있다. 노동할 수 없는 연령이 되었을 때의 건강권도 지켜져야 한다는 등의 권리는 아주 먼 미래의 일이고, 지금 내 옆의 누군가가 심야노동으로 정신적인 질병에 시달리거나 죽어도, 또 설사 그것이 나의 미래에 치명적인 건강의 위협이 있더라도 지금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해야한다는 절박함에 이 사회의 노동자들은 허우적거리고 있다. 또 이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야말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완변한 승리다.

사회의 부정의를 지적할 때 그 기준은 내가 아니라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물론 쉽지 않는 이야기고, 뜬구름 잡는 말로 들릴 수도 있다. 특히 노동의 문제는 먹고 사는 문제이기에 '내가 내 몸으로 내가 먹고 살기 위해 일 한다는데 뭔 상관이냐'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새벽노동으로 사람이 쓰려져 죽어갔다면, 또 죽을 수 있고, 미래에 치명적인 정신적 신체적 위험에 처할 수 있다면, 벌고 사는 그 어려움세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노동의 해악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해악을 직시할 수 있도록 서로 돕고 격려해야 한다. 당연하게 내세워지는 자본주의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문제화해야 한다.

모두의 권리가 보장되는 '함께 사는 삶'의 가능성을 상실한 우리가, 각자 개인으로는 절대 이 현실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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