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클레임]
오늘이 수능이다.
우리 기억에서는 사라졌겠지만 해마다 열아홉 아이들이 죽어간 사고가 있었다.
수능이 있기 전.
스크린 도어에서 19살 청년의 몸이 찢겨 나가고, 콜수를 채우지 못한 실습생이 스스로 자살을 했고, 제주도에서는 아무런 안전 장치의 보호를 받지 못한 현장 실습생이 기계에 빨려 들어가 죽었다. 그래도 세상은 수능 이야기로 이 모든 비극을 덮었다.
노동의 격차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노동하는 사람이 대우받는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겠다. 라는 말은 모든 정치인이나 사회 지도층들이 앵무새처럼 하는 말이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내 아이는 저런 노동을 시키지 않으려 불법 전입도 하고, 교수들은 안식년에 자기 자식들을 데리고 유학길에 오른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 그래서 몸이 아닌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특권이 보장 받아야 한다. 이런 생각은 상당히 오래된 생각이다. 특히 계몽주의 이래도 이것은 상식이 되어 버렸다.
헌데 노동자인 우리는 자본주의의 이런 상식을 왜 폭력으로 느끼지 않을까? 19살의 청년이 스크린 도어에 죽어 나가고, 콜 수를 채우지 못한 학생이 자살을 하고, 아무런 보호 장치도 없이 기계 안으로 들어가 죽어 나가는 이 엄청난 살인을 눈 앞에 두고도 왜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수능만을 얘기할 수 있냐 말이다.
이런 노동의 분할은 기존 세력이 만든 폭력이다. 지식인들이나 기존 지배세력들이 자신들이 가진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적 장벽을 쌓기 위해 교육을 이용한다. 사회가 교육을 통해 불평등하게 재생산 되고, 사회의 불평등성이 교육의 불평등성을 통해 재생산 되고 있는 것이다.
열아홉.
수능 또는 대입 제도를 난 잘 모르겠고 또 아는 척 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한국은 전 국민의 서열화가 가능하다는 믿음과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능력' 공정'이라는 말을 신앙처럼 신봉하는 나라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에 서열이 어디있냐 반문하겠지만 사실 우리는 이 서열화를 받아 들인지 오래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수능과 대입제도다.
우리 아이들은 슬프게도 등급에 맞춰 자신의 자리를 익힌다. 소고기 육질에 등급을 찍어 나누듯이 우리 아이들도 등급이 찍혀 교육에서부터 차별과 배제를 받는다.
우리가 진정 분노해야 한 것은 지금 이런 현실이 아닐까?
그런데 우린 지금 뭐라고 하고 있나? 그것이 공정한 경쟁이고 아이들 열정과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말하며 정부 - 언론 - 가정이 신성동맹을 맺고 있다. 즉 수능(대입)과 그 서열화는 그 누구도 깰 수 없는 신성한 것이 된 것이다.
그럼 이 끝자락 바깥에는 누가 있을까? 아마 우리 머릿속에서는 대학을 나오지 못한 열아홉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은' 이들이 차례로 떠오를 것이다. 등급 표 조차도 받지 못해 일터에서 어떤 부당한 일을 당해도 항거하지 못하고,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곳에 일을 하다 죽어도 괜찮은 노동자로 말이다.
열아홉에 수능 대신 '안전모'를 쓴 아이들의 권리와 자율성이 능력과 공정성이라는 이름으로 박탈될 때, 우리가 본 '중대재해기업처벌법'같은 정치적 비합리성을 계속 보게 될 것이다. 국가와 자본은 이렇게 아무렇게나 쓰고 죽여도 되는 가장 밑바닥의 노동자들을 사회가 용인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를 계속 만들어 사람에게 등급을 매기는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사회적 지위 또는 위계서열 자체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사람들 이야기를 인정하기로 하자. 그러나 적어도 고작 몇 개의 잣대로 모두를 줄 세우는 이 사회가 정말 공정한지 아니 정상인지를 누군가는 이의를 제기해야 정상적인 사회가 아닐까?
수능, 대학, 서울대, 법대, 의대 이런 아이들의 등급이 사라지면 한국 교육과 한국 사회는 무너지는가?
왜 우린 소수의 이런 엘리트들만 모든 사회적 권리를 차지하는 것이 공정한 경쟁이라 생각하는가?
이것을 없앤 교육과 사회를 정말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인가?
이런 교육이 만든 사회가 어떤지를 한 번 돌아볼 수는 없는가!
정말이지 이 사회에서는 자신의 몫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람들이 많다.
고(故)김용균의 어머니가 그랬고 지금도 많은 노동자들의 처지가 그렇다. 그럼에도 이들의 목소리는 이른바 상층 기득권에서 나뉜 진보와 보수의 정치에서는 결코 해결되지 않고 있다. 즉 한국의 정치는 진보가 보수가 아닌 몫 가진 자들의 기득권에서 그들만의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져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정한 경쟁'으로 은폐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노동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일인가는 그 일 자체에 내재돼 있는 것도 아니고, 시장의 수요 공급 원리나 희소성의 법칙에 따라 결정된 것도 아니다. 즉 사람들이 주구장천 떠드는 많이 배워서 그만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 투쟁과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 낸 결과다. 한국처럼 대학으로 줄 세워 경쟁이라는 것으로 법, 의료, 금융업계, 지식업계 종사자의 임금과 소득을 가파르게 상승시킬 때, 다른 사회에선 사회적 필요성과 공공적 기여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노동가치를 셈하기도 한다.
'공공에 복무하는 노동으로 버스 운전자와 대학교수 월급에 별 차이가 없는 노르웨이 같은 나라도 있고, 생명을 살리는 농민과 의사의 노동가치가 대등한 쿠바 같은 나라도 있다.'
이 말은 한국이 무조건 저 나라들과 같아져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노동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자본과 노동 세력 관계의 계급투쟁 즉 정치적 과정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지 않고 모든 노동 가치를 경제의 '섭리'로 설명하면 노동가치에 대한 사회적 투쟁과 재협상은 들어설 여지가 없다. 한국 사회가 '경제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들의 목숨을 한 해 2,000명이 넘게 뺏고도 법 제정이 안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열아홉 살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고 나가야 되는 청소년들이 살아갈 세상의 룰을 우린 이제 좀 바꾸어야 한다. 지금도 너무 늦었다. 이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지금의 룰을 만들고 이 룰에 의해 돌아가는 사회에서 혜택을 받고 있는 기득권을 깨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것을 상층에서 말하는 '개혁'으로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김대중 - 노무현 - 문재인 정부를 경험한 값진 교훈일 것인다.
작업복을 처음 입은 열아홉 살이 어떤 곳에서. 어떤 일을 하든 정치적 주체로서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제 목소리로 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 때 노동이 존중 받는 사회'가 될 수 있다.
또 국가(대통령)는 이해관계자들(자본가와 노동자)의 조정자가 아니라 헌법의 수호자다.
국민의 기본권은 기업가의 협상이나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노동권은 국민의 기본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통령이 말하는 노동 "존중"은 언론 앞에서 보이는 눈물과 온정 정도로는 전혀 해결할수 없다. 죽음의 외주화를 막으려면 죽은 비정규직을 위해 눈물 흘리는 대신, 이윤을 위해 사람을 사지로 내모는 기업(설사 그것이 5인 미만 기업이라도)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
매일 노동자 8명이 일터에서 죽는다. 대부분이 비정규직, 하청, 특수 고용 노동자들이다. 즉 열아홉 살 교복 대신 작업복을 입는 한국 청소년들 미래가 죽음의 일터라는 말이다. 정말로 노동조합이 필요한 노동자들은 이런 사람들인데 한국에서는 이런 사람들은 노조 할 권리가 없다. 그래서 노동자들도 법 개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깨지지 않을 거 같은 현재의 상태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아 한다. 왜 내가, 내 아이가 이런 차별과 배제 속에서 죽어가야 하는지를 말이다. 그래야 지금의 구조가 흔들린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금의 구조와 제도는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다. 나와 당신들이 침묵했기에 나타난 정치적 선택의 결과물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절대 이런 사회에서 공정한 경쟁과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바랄 수 없다. 혁명이란 이런 폭력적 사회를 바꾸자는 것이다. 제도가 바뀌고, 사람들 생각이 바뀌고, 재산정도가 바뀌고...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삶의 방식 모두가 바뀌지 않고는 절대 이런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저 아이들의 눈물에 나와 당신들은 정말 책임이 없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