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린자의 선택

사진=정보철 편집위원
사진=정보철 편집위원

[뉴스클레임]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순간적으로 블링크가 일어났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이다. 내가 지금 머물고 있는 도시의 이름을 기억해보려 했지만 도통 생각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이곳은 2층 카페라는 것. 그리고 나는 창가에 앉아 저물어 가는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창밖의 도로 건너에는 빌라가 보이고, 내가 안심을 한 것은 빌라가 작은 규모라는 것이다. 이곳은 시내임에도 불구하고 아담한 빌라 단지가 자리 잡았다는 것이 무엇보다 맘에 들었다. 

나는 길게 숨을 들이켰다. 오랜만에 들이키는 심호흡이다. 거칠지 않은 도시에 내가 있고, 그 거칠지 않은 도시의 한 자락에서 오늘 밤을 지낼 수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며칠 전, 나는 서둘러 서울을 빠져나왔다. 아침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 순간적으로 서울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청량리역 대합실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했다. 

어디로 갈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서울을 한시바삐 탈출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되도록 서울에서 멀리 떠나 있고 싶었다. 다행히 제일 먼저 떠나는 열차표를 역 창구에서 살 수 있었다. 휴가철인데 불구, 입석 자석을 구한 것이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최근 들어 똑같은 꿈을 계속 꾼 것을 기억해냈다. 기침을 콜록거리는 젊은이의 모습이 보인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입술은 앙다물고 있었다. 눈빛은 단호했다. 그리고 이어진 장면은 충격적이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성큼성큼 숲속 깊숙한 곳으로 사라지고 없다.

나는 예전에 동양화 앞에서 한참을 멈춰서 있었던 적이 있었다. 깊은 산속의 오솔길, 그 길을 올라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그린 동양화에 눈길을 뗄 수 없었다. 조그만 오솔길은 어느새 숲으로 덮어지고, 산길을 걷던 그림 속의 사람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세상은 마야라고 한다. 마야는 겉모습에 사로잡히는 것을 말한다. 겉모습은 환영이다. 그래서 세상은, 삶은 환영이라고 한다. 안개 속 같은 환영 속에서 사람들은 자칫 깜박하면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이다.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기 일쑤이다. 내가 서울을 떠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퇴로도 확보하지 못했는데, 출구마저 찾지 못한 탓이다.

나는 거래가 당연시되는 사회에 익숙하지 못하다. 익숙하지 못하다는 것은 불편하다는 것이다. 불편은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강한 자는 저항하지 않는다. 강한 자만이 무엇이든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 강자에게 필요한 자질은 불편한 현실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는 자세뿐이다.

나는 강자가 아니라, 여린 자이다. 여린 자는 현실을 불편해하고, 현실을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정체성 때문이다. 청량리발 기차를 타면서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까짓 정체성이 뭐라고….’

열차가 창량리 역사를 떠나자마자 보이는 것은 하늘이었다. 하얀 뭉게구름이 열차 속도에 맞춰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뭉게구름과는 의미깊은 기억이 있다. 수년 전의 일이다.

늘상 보던 하얀 구름이었지만 그날은 달랐다. 뭉게구름이 웃으면서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다는 느낌이 확 다가왔다. 그게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화들짝’ 놀라며 나는 전날 만난 사람의 명함을 뒤적여서 찾아냈다. 그라고는 곧바로 전화번호에 ‘선물’이라고 저장했다. 나는 이제부터 그 사람의 이름을 ‘선물’이라고 부르겠다.

선물을 느낀 것은 서울 외딴곳의 한 카페에서 친구가 일 끝나기를 기다리던 중 벌어진 일이다. 친구는 서울에서 사립고등학교 교사를 중도에 그만두고 카페에서 바리스타를 하고 있었다. 물욕이 없는 그는 거울 같은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다. 친구를 만나는 날, 하늘은 거울이 되어 선물을 비췄다고 생각이 든다. 

지난봄에, 우리 일행은 영천에 도착했다. ‘선물’이 영천의 산골 마을로 이사간 후에 처음 방문하는 자리였다. 문패도 없는 시골 누옥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얘기를 나눈 후 대문 밖의 도로변에 꽃나무를 심었다. 꽃나무 수십 그루 마당에 가져다 놓고, 일을 벌이지 못하고 있는 ‘선물’(당시 몸이 아팠다) 대신에 일행 중 박정환 대표가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선물’이 영천에 내려간 것은 일상의 즐거움 때문일 것이다. 소박한 생활 속에서 삶의 지혜를 누리고 싶은 마음일 게다. 

선물은 거래가 아니다. 무엇을 기대해서 주는 것은 장사이지 선물이 아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계산 없이 주는 것이 선물이다. 더 나아가 진정한 선물은 흘러넘치는 것이다. 계속해서 흘러넘치는 존재만이 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선물’은 거울이다. 더해서 보태거나 덜해서 빼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탐욕이 빗물처럼 스며들어 제대로 실상을 비추지 못하는 거울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선물’의 거울을 통해 앞날을 비춰본다. 

그것이 항상 가능한 이유는 ‘선물’에게는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생존에 필요한 욕구만 있다. 욕망은 절대 만족될 수 없지만 욕구는 충족될 수 있다는 것을 ‘선물’을 통해 새삼 깨닫는다. 하나의 욕망이 충족되면, 또 다른 욕망이 꼬리를 잇기 마련이다. 

올 초의 얘기이다. 영천 산골까지 찾아온 사람이 요구한 귀중한 것들을 ‘선물’은 전부 줘버렸다. 그리고는 한마디 던졌다.

“그것은 이제 한갓 진흙 덩어리일 뿐입니다. 당신의 탐욕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탐욕은 현실적인 삶을 가능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욕망의 용광로에 뛰어들어가서 나란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린 삶을 살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강자들이 선택하는 삶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불편하다. 불편하다는 것은 지금의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기차 안에서 불편한 자세로 글을 쓴다.

나는 욕망을 버리지도, 욕망을 파고들지도 못한 채 미지근한 채 살아왔다는 것이 내 삶의 현주소이다. 욕망의 경계 선상에서 나는 항상 머뭇거렸다는 말이다. 나는 나만의 세계에 침잠, 그곳에서 안도감을 느끼며 살아왔다. 그러나 언젠가는 현실 세계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전날 꾸었던 꿈을 더듬고 있다. 변화의 여정은 꿈을 의식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아직도 전생의 카르마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 여인이 칼을 크게 휘두르고 있다. 서구의 노예사냥으로부터 앙골라국민을 지켜낸, 그러나 서구사회로부터는 포악한 식인자로 묘사되는 은징가 여왕이다. 여왕의 둘레에 황금빛 아우라가 펼쳐진 것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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