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률 작가
박상률 작가

[뉴스클레임]

시 ‘황무지’를 쓴 T. S. 엘리엇은 시는 뜻을 모른 채 이해되지 않고도 전달할 수 있다고 했지만, 노자는 도덕경에서 대교약졸(大巧若捽)이라고 했다. 이는 어떤 재주나 기술이 보기에 서툰 듯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더 어렵다는 얘기 아닌가? 뿐만 아니라 17 세기의 프랑스 수필가 로슈푸코는 ‘재능을 돋보이지 않게 하는 게 진짜 재능’이라는 취지의 글을 남겼다.

이번 시집(그케 되았지라/걷는사람 펴냄)을 읽은 지인들의 반응이 가지각색이다. 힘을 빼서 공감하기 좋았다는 얘기부터 시의 언어에 긴장감이 없어 시 고유의 ‘기법’ 수련이 덜 된 것 아니야, 라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까지.

나는 시의 언어, 일상의 언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일상의 언어가 시어가 되려면 알맞은 자리에 알맞은 모양으로 가서 들어앉아야 한다. 어쩌면 내 시에서 그게 부족했는지는 모른다...

대교약졸이 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는 자책이 든다. 음식을 만들 때 양념을 치지 않으면서도 맛깔스러운 맛을 내는 요리사의 경지. 나는 아직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해 늘 애쓴다. 담백하고 슴슴(심심)하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를 지향한다.

하지만 이건 놓치지 않았다. 국민학교밖에 못 댕긴(다닌) 우리 어머니 세대들의 언어를 잘 받아 적는 일. 많은 사람들이 이해 못하는 걸 되레 ‘고급스럽다’고 여기는 시라는 물건을 제 자리에 앉혀서 시의 등장인물인 ‘보통 사람’들도 이해하는 시를 쓰려 했다는 것.

문장에서 힘 빼고도 감동을 줄 수 있고, 어려운 말로 기호나 암호 풀이 하지 않게 하고도 시를 느끼게 하고 싶었다. 글 선생 30 년 동안 산문에서고 운문에서고 줄곧 고민하였던 것들이다.

시가 자꾸 독자들에게서 외면 받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등학교 졸업 이후엔 시를 잘 안 읽는다고 한다. 교과서에서 시의 재미를 못 느꼈기 때문이다. 국어 책에서 시를 배울 때 기호 내지는 암호 풀이를 주로 했기에 시에 정나미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내 모든 글에서 풍자와 해학을 기본으로 하는 ‘골계미’를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 일상과 글에서의 풍자와 해학은 기계에 기름을 치는 것과 같다. 기름을 치지 않으면 기계가 잘 돌아갈까? 사람 무릎에서도 연골이 다 닳으면 걸을 수 있을까?

촌철살인 같은 풍자를 통해 웃으면서 비판하고 공격하며, 해학을 통해 웃으면서 사랑하고 감싸 안아 주는, 옛 촌로들의 달관한 듯한 삶의 자세를 글쓰기의 어떤 기법보다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야 공감이 되고 감동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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