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없는 자들의 관계
[뉴스클레임]
비 오는 날에는 ‘천일의 앤’ OST를 계속해서 듣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그런 날에는 구슬픈 곡조에 스며든 ‘앤 불린’의 삶을 회상하면서,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선에 서서 방황하는 날이기도 하다.
살아 숨 쉬는 자들은 모두 연약하다. 거친 바람 속에서도, 희박한 공기 속에서도 가쁜 숨이라도 내쉬는 자들은 더욱더 연약하다.
관계는 연약한 자들 사이에서 이뤄진다. 산들바람에도 꽃잎을 바르르 떨며, 조금이라도 세찬 바람이 불면 풀잎처럼 누워버리는 그런 연약한 자들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막걸리 한잔해요.”
오랜만에 이루어진 통화에서 대뜸 ‘이번 주에 만나자’라고 했다. 모든 것이 즉흥적이다. 다음으로 미루는 법이 없다. 그 말인즉슨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느낌으로 받아들이고 행동한다. 생각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느낌은 순간적이다. 나도 엉겁결에 대답하고 말았다. 503호 남자와 여자 앞에서는 나는 무장해제된다. 우리가 술 마시기로 한 날은 절묘하게도 비가 내렸다. ‘천일의 앤’이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날이라는 말이다.

우이동 계곡에는 막걸리 마시기 딱 좋은 집이 하나 있다. 무당들이 흔드는 오방색 깃발 같은 것을 가게밖에 꼽아놓는 등 이질적인 술집 외관, 그리고 도로까지 흘러나오는 70, 80 노래가 단숨에 이목을 끌었던 술집이었다. 정감 있는 사람과 술 한잔 기울이기에는 딱 맞은 술집이었다.
1년여 만에 마시는 술이었다. 피치 못 할 자리에 가더라도 의례적으로 한 잔 정도 비우는 정도였다. 비논리적인 말이겠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끊임없이 경고음이 울려왔었다. 경고음은 다름 아닌 ‘생각 말고 느낌’인 사람과 만나라는 신호였다. 이상하게도 생각 많은 사람과 술을 마신 후 며칠간은 몸져누웠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술잔을 드는 속도가 빨라졌다. 시간을 재보지는 않았지만, 막걸리 한 병을 비우는데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잔을 비우기가 무섭게 곧바로 잔을 부딪치기도 했다.
술 마시는 도중에 주종을 소주로 바꾸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냥 떠들고 마시는데 어느새 소주잔을 바꿔 들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이날은 특별한 날이었는지, 쉼 없이 술을 들이켰다.
다음날, 숙취는 없었지만, 머리는 멍한 상태가 됐다. 책 한 장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전날, 술을 조절할까도 잠시 생각했지만, 그것은 생각으로만 그쳤다. 그런 생각은 우리 관계에서 어울리지 않는다.
관계라, 사람들은 자신의 울타리를 세워놓고 그 울타리 너머를 힐끗 보는 것을 관계라고 부르는가 보다. 서로 간에 울타리 너머를 결코 넘어가지 못하면서도 사람들은 좋은 관계를 들먹거린다.
울타리를 치는 것은 안전을 꾀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는 각자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무엇보다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내 지위 내 집 내 재산 내 성격 내 욕망 등 모든 것을 지키는 데 울타리가 안전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관계는 울타리를 격의 없이 넘나드는 것이다. 격의 없다는 것은 서로 간의 간격에 생각이 들어설 틈이 없다는 말이다. 둘 사이에 생각이 개입되는 그 순간부터 그들은 거래하는 것이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관계는 논리가 끝난 지점에서 시작된다. 논리를 초월한다.
생각이라는 논리가 작동되는 곳은 거래일 뿐이다. 거래는 결론을 조건으로 만나는 것이다. 결론을 밀어붙이는 것은 안전한 삶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삶은 불확실하고 전혀 안전하지 않은데도 말이다.
503호 남자, 여자와의 술 마신 다음 날에도 비가 슬며시 내리고 있었다. 그날도 천일의 앤 OST를 듣던 도중 503호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503호 여자가 휴대전화를 잊어버린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1년 전에는 그들과의 술자리에서 내가 휴대전화를 잃어버렸었다. 술에 취해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혼란스러운 일들이 벌어진다는 점에서, 이들과 나는 ‘술 마시는 버릇이 묘하게 닮았다’라는 생각에 미치자 실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천일의 앤’은 영국 왕 ‘헨리 8세와 여왕 앤 불린’의 로맨스를 다룬 영화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20세기를 마감하면서 뉴욕타임스가 지난 1000년 동안 제일 유명한 스캔들로 선정할 정도로 파란만장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세기의 로맨스’라는 것은 궤변적 언어의 유희이다. 이야기는 헨리 8세가 앤 불린을 처형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욕망의 거래가 끝났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 1000일 동안의 로맨스는 욕망의 거래일 따름이다. 거래는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죽은 자들의 향연이다. 여기서 죽은 자들은 영혼이 시체처럼 굳어있는 자를 말한다. 어찌 보면 이들의 이야기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일지 모른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혼란을 초래한다. 죽은 것만이 명확하고 변하지 않는다. 생화가 아닌 조화처럼 말이다. 삶에서 명확한 것만을 추구한다면 뿌연 안개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남는다. 삶은 항상 새롭고 변화하는 것이고, 관계는 이런 삶의 움직임에 대한 반응이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울타리를 활짝 여는 것이고, 그것은 상처받기 쉬운 상태에 처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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